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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빌 게이츠의 다섯 가지 결단

행복 금융 2008. 6. 30.




출처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7827

‘소프트 파워’로 골리앗 IBM을 넘어서다

세상을 바꾼 빌 게이츠의 다섯 가지 결단

이희성 | 제68호 | 20080629 입력 블로그 바로가기
‘IT 거인’ 빌 게이츠가 걸어온 길
마이크로소프트 CEO인 스티브 발머는 27일 빌 게이츠의 퇴임 행사에서 “우리는 세계 최대의 컴퓨터 회사(IBM)와 정면으로 맞서 승리했다”고 언급했다. 세계 경영사에서 MS와 IBM의 경쟁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비유된다. 1970년 중반에 창업한 작은 소프트웨어 회사가 컴퓨터업계의 공룡인 IBM보다 더 돈 잘 버는 회사가 된 것은 드라마틱한 사건이다. 지난해 MS는 140억 달러, IBM은 104억 달러의 순익을 기록했다. 신화의 원동력은 빌의 유연한 사고와 비즈니스 마인드였다.

빌의 경영을 분석한 작가 로버트 헬러는 “빌은 천재 기술자라기보다는 천재 사업가로 봐야 한다”고 단언했다. 그가 토머스 에디슨처럼 발명을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주위에 널린 지식과 기술을 조합해 사업화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는 세계를 바꿨다. 그래서 천재 사업가로 평가받는다. 그가 내린 하나 하나의 결단은 21세기 세계인의 생활에 큰 자취를 남겼다.

제1결단
하버드를 뛰쳐나가다


1973년 빌은 1600점 만점의 SAT(미국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1590점으로 하버드대학에 입학했다. 미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유명한 변호사였던 아버지 윌리엄 게이츠 시니어는 물론 어머니 메리 게이츠도 빌이 변호사의 길을 걷길 원했다. 그러나 이미 중·고교 시절 컴퓨터 신동으로 이름을 날렸던 빌은 부모의 바람을 저버렸다. 75년 1월 빌은 어릴 적 친구인 폴 앨런과 함께 한 전자 잡지에서 세계 최초의 소형 컴퓨터에 관한 기사를 읽고 흥분했다. 그는 즉시 이 컴퓨터를 만든 MITS에 전화를 걸어 컴퓨터 언어인 베이직을 만들어 주겠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이 계기가 돼 그는 하버드를 뛰쳐나와 MITS가 있던 뉴멕시코주 앨버커키로 날아갔다. 여기서 MS가 태어났다.

제2결단
소프트웨어를 팔다


빌이 사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미국에서도 소프트웨어를 돈 주고 사는 것이란 인식이 없었다. 그러나 빌은 달랐다. 앞으로 컴퓨터 시장은 하드웨어가 아닌 소프트웨어가 장악할 것이란 생각을 갖고 IBM에 접근했다. IBM과의 다리는 어머니가 놨다. 빌의 어머니는 IBM 최고 경영자 존 에이커스와 같은 자선단체 회원이었다.
마침내 80년 IBM 관계자들이 빌을 찾아왔다. 그들은 IBM PC에 사용될 운용체계(OS)를 만들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는 OS를 갖고 있지 않았다. 여기서 빌의 특기가 잘 드러난다. ‘먼저 팔고 뒤에 만들어라’는 원칙이 빛을 발한다. 그는 IBM과 이야기를 나눈 지 이틀 만에 ‘시애틀 컴퓨터 프로덕트’사가 갖고 있던 Q-DOS를 5만 달러에 샀다. 약간 수정한 뒤 이 프로그램을 MS-DOS로 이름 붙여 IBM에 8만 달러에 납품했다. 빌은 IBM이 이 프로그램을 무기한 사용하는 대신 MS가 다른 회사에도 이 프로그램을 팔 수 있다는 조건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공룡 IBM에 납품한 프로그램을 마다할 회사는 없었다. 95년 발간한 저서 『미래로 가는 길』에서 빌은 이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소프트웨어를 줌으로써 전략적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그 후 컴퓨터 업계에서 잘 확립된 마케팅 기법이 됐다.”

제3결단
표준을 장악하다


빌은 일찌감치 ‘전 세계 모든 책상에 개인용 컴퓨터(PC)를 놓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갖고 있었다. 최대 걸림돌은 프로그램이 서로 호환되지 않는 것이었다. 즉 IBM사가 만든 PC와 DEC사가 만든 PC에는 각기 다른 OS가 사용돼 응용 프로그램도 각기 달랐다. 이로 인한 비용 부담이 만만찮은 것은 물론 이용자들이 여간 불편해하지 않았다. 빌은 IBM을 기반으로 보폭을 넓혀 나갔다. 마침내 세계 PC 운용체계가 MS의 윈도로 통일되자 PC 보급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MS는 독점과 관련해 비난을 받을 때마다 “OS가 표준화된 덕에 이용자들은 호환 문제를 걱정할 필요 없이 저렴한 가격에 PC를 사용할 수 있게 됐다”고 반박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제4결단
인터넷 시장에 뛰어들다


93년 세계 최초로 인터넷 웹 사이트가 생겼고, 곧이어 넷스케이프가 웹브라우저를 내놓았을 때 빌은 인터넷 시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는 “처음에 우리는 인터넷을 사업의 우선 순위에서 5~6번째에 뒀다”고 나중에 털어놓았다. 95년이 되자 빌은 달라졌다. 직원들에게 ‘인터넷의 거대한 파도’라는 이름이 붙은 메일을 보냈다. 이 메일에서 그는 회사의 모든 역량을 인터넷 사업에 투입하겠다고 공표했다. 그는 이듬해 11월까지 익스플로러 개발에 14억 달러를 쏟아부었다. 이는 넷스케이프 전체 매출의 7배가 넘는 규모다. 개발인력도 넷스케이프보다 7배 많았다. 물량 공세와 함께 빌은 OS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이점을 십분 활용했다. 즉 익스플로러를 윈도 시스템에 공짜로 끼워 팔았다. 반면 자금력이 취약했던 넷스케이프는 초기 무료로 제공했던 웹브라우저를 돈 받고 팔 수밖에 없었다. 결국 넷스케이프는 문을 닫았다.

제5결단
거대한 자선재단을 설립하다


1990년대 후반 미국과 유럽에서의 잇따른 반독점 소송으로 빌은 미국의 전설적 부호였던 존 D 록펠러와 유사한 이미지를 갖게 됐다. 즉 석유 수송망을 장악해 석유 산업을 쥐락펴락했던 록펠러처럼 빌도 PC의 운용체계를 장악해 거대한 독점 사업가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때 그는 차원이 다른 생각을 하게 됐다. 록펠러처럼 그도 재단을 설립하기로 한 것이다. 2000년 그는 자신과 아내 멜린다의 이름을 딴 ‘게이츠 앤드 멜린다’ 재단을 출범했다. 이후 이 재단은 387억 달러의 자산을 보유한 거대한 재단으로 성장했다.

회한
“검색시장을 가볍게 여겼다”


빌은 인터넷 검색시장을 등한시했다. 오히려 미디어 기능에 주목했다. 그래서 NBC와 공동으로 뉴스방송인 MSNBC를 설립했고, MS의 인터넷 사업부인 MSN도 검색보다는 채팅과 미디어 기능에 주안점을 뒀다. 빌은 인터넷업체의 수익이 검색 부문에서 대부분 나오는 사실을 깨닫고는 마음이 급해졌다. 구글이 미국 검색시장의 60% 이상을 차지한 반면 MSN은 10%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또 구글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MS의 최고 기술자를 잇따라 스카우트했다. 그래서 빌은 일거에 반전하기 위해 얼마 전 야후 인수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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